누군가 세월의 힘이 무섭다고 했던가. 돌이켜 보면 진정 별것도 아니었던 날들이었다고도, 어쩌면 진정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순간들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살다보면 갑자기 지하철 안에서도 불현듯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도 있고, 그리고 정체성을 인정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소설을 쓰면서 부터이다. 껌을 뱉으며, 내가 그를 잊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난 그때까지만 해도 진정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두문불출 바깥출입을 삼가한 것이 어느덧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과의 연락을 철저히 끊은 다음의 생활. 연락할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연락할 사람이라고는 을진이와, 가끔 만나 술을 마시던 선배 P일뿐.
언덕 밑의 포장마차에서 을진이를 만났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그녀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아마 나도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마음속 짐승의 울부짖음 때문이었을 게다. 내속에 살고 있는 작은 짐승 한마리, 나도 제어 할 수 없는 그 짐승을 난 악마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청에 아무런 댓구도 없이 집앞 하얀 두건을 쓴 두남자가 운영하는 포장마차를 약속장소로 알려주었다.
을진이는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이미 술에 흥건히 취한 상태였다. 10분 전에 도착해 미리 손국수와 소주 한 병을 시켜 두고 홀짝 거리던 나에게 한방의 일침을 가한 을진이.
"넌 죽어도 먼저 연락하진 않을 독한 기집애야, 니가 뭘 그리 잘났냐? 잘난 척 좀 그만해. 누구는 너보다 못나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을진이는 취해 있었다. 하지만 취중에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넌 나보다도 더 바보야."
어떤 화가의 말이 기억났다. 사람의 부류엔 두가지가 있다고.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자신이 바보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 그중 을진이는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아는 부류의 인간이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보다도 내가 더 바보라는 사실을 소리 높여 강조했다. 그랬다. 난 아직도 그에 대한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있는 것이겠지. 본래 그리 나대는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녀나 중이 되려고 마음먹었던 적도 없었으니까. 뭐랄까, 세상 사람들과의 대면, 그들과의 관계 맺음에 대한 염증이라고나 할까.
"그래, 알고 보니 나도 바보였어 을진아. 그럼 이만 일어나자. 우린 바보들이잖아."
"아가씨들, 오랜만인데, 왜들 벌써가요? 손님도 없는데, 술이나 한잔 더하고 가지요?"
하얀 두건을 쓴 남자의 제안이었다. 을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내젖고 있었다.
가녀린 을진이의 팔목에 지금껏 본적이 없었던 낯선 시계가 끼워져 있었다.
"시계가 아주 돋보이네요. 아가씨."
"아, 이쁘지요. 남자친구랑 같은 것으로 산 거예요. 그 사람 것은 이것보다 두배는 알맹이가 커요. 저의 무게를 느끼게 더 큰 것으로 사겠다고 그랬어요. 히히. 저도 이 시계를 차고 있으면 그 사람의 무게가 느껴져요."
을진이는 남자친구의 얘기를 할 때 잠깐 빛을 발했다. 그리곤 여전히 고개를 떨구었다.
하얀 두건의 남자의 부축으로 을진이는 무사히 내방 침대 위에 뉘여졌다. 난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커서의 반짝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을진이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하린아, 힘들게 살지마, 살아가는 모습은 다 똑같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지금 행복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내게도 얘기하지 못하는 고민이 많다. 하지만, 난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수용할 뿐이다."
"잘되가고 있잖아, 너는"
"응, 그런데, 가끔 외로워져. 그 사람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할 때 흘러나오는 노래가 헤어진 여인과의 이별을 애절하게 받아들이lj
16; 가사면 이제는 나의 옛 사랑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사람과 짧은 사랑을 나누었던, 나 때문에 헤어졌던 그 여자가 떠올라.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그러면 난 그만 그 음악을 꺼버리고 싶어.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사람이 혹시나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라도 하면 내 마음은 찢어지지.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람 손을 잡아 주지. 이런 기분 정말 더럽지."
을진이는 참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주는 약간의 사랑을 아주 크게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서 키워 나가고 있었다.
정작 나는 보여지는 것들만을 보면서, 해석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키면서 역전시키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피하는 나와 도전하는 을진이의 차이점, 무엇이 제대로 인생을 살아내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도전하는 자에게 변화가 온다는 것만 보일 뿐. 그렇다. 난 보여지는 것만을 믿는 인간이니까.
갑자기 그가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그 사람의 냄새와, 그 사람의 애무와, 그 사람의 웃음이 미치도록... 그 사람과 묶었던 여관까지도.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나야, 하린이."
"여보세요. 하린이? 너 지금 어디야?"
다급하게 묻는 그 사람의 목소리.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심한 피곤이 몰려들었다. 심장 박동이 요란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