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료인 P는 나와 격렬한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에도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표정을 읽고 있었고, 그리고 내 심경엔 그를 향한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챈 듯 했다. 자주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고, 그리고 가끔 나를 보곤 싱긋 웃어 주곤 했다. 낯선 남자,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그것도 옆 자리에 앉은 회사 동료와 아무런 얘기도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하룻 밤 유체의 탐닉을 추구하고 나서도 내겐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 머릿 속에는 여전히 그에 대한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까지 그는 내게 한통의 전화도 없었으니까. 물론 나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오랫만에 10년 지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나야, 을진이, 너 요즘 통 연락이 없다. 무슨 일 있니?"
하지만 실은 을진이의 전화 목소리 속에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 이 친구도 마음이 황폐하구나, 그런 느낌, 우린 그런 느낌을 단박에 알아버린곤 하는 친구였으니까. 아마도 을진이 또한 내 신상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날 내 목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린 그랬으니까. 을진이의 차를 타고 양수리 강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갔다.
"그녀의 잘 다듬어진 질리도록 하얀 흰손은 금방 가루가 될 것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가끔 그 손위에 내 손을 얹어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보다 그녀의 말을 먼저 듣는 쪽이 우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친구는 서로 닮아 가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도 하다. 한쪽이 힘든 일이 있으면 다른 한쪽도 바로 그런 상황에 닥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그 문제를 식탁 위에 쏟아 놓고 밤이 새도록 서로의 아픈 부분을 위로해 주는 것이겠지. 그러니 친구겠지.
"나 남자 생겼다."
을진이는 손을 닿으면 바로 강물이 만져질 것만 같은, 자살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처럼 보이는 그림 같은 곳에 차를 세우고 그리고 담배를 한대 꺼내 물더니 얘기를 꺼냈다.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흔들리며 차창에 부딪쳤다.
"그런데 지난주에 헤어졌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 그런데 지금 내가 더 힘들어."
"그 남자는 안 힘들어 해?"
"아마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겠지. 그 남자는 자기가 아주 강한 남자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남자거든. 절대 남에게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바보지. 어제 전화를 했었어. 그런데 아주 냉정했어. 헤어지기 위해선 자신이 많이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보."
"그렇게 힘들면서 왜 헤어지자고 먼저 그랬니?"
"너무 사랑할까봐 두려워서. 그러다가 그가 먼저 날 떠나갈까봐. 너 그런 기분이 뭔지 아니?"
난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 내가 그런 심정이니까. 만약 내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난 그 남자를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데리고 와 그녀의 옆에 앉혀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게 하고 싶었다.
"사랑하면서도 늘 불안하고 그래서 불행했어. 언젠가는 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왜 그런 느낌이 들지, 너와 나는 항상?"
"너도 그렇구나, 그래 오늘 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네게도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
"응, 아니야, 난 그저, 우린 똑같잖아, 사랑도 똑같이 하고, 아픔도 똑같이 겪는, 우린 친구니까..."
난 그녀의 슬픔 앞에 내 슬픔을 얹어 줄 용기가 없었다. 슬픈 사랑을 하다보면 가끔 굉장히 로맨티스트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이론으로 아주 박식해 지곤 한다. 아마 우리 둘은 그런 슬픈 사랑을 하면서도 어쩌면 스스로를 완벽하게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아주 슬픈 일이 되는 것 같아."
을진이는 어느새 염세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의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우린 많이 힘들었어. 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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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런 생각이 그를 못견디게 했고, 그의 못견딤이 날 불안하게 했고 그랬어. 그래서 끝내기로 한거야.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쉽게 우리의 이별을 수긍하고 나올 줄은 몰랐어. 내가 견디기 힘든 부분은 바로 그거야. 우리의 그 동안의 사랑이 결국 이것밖에는 되지 않았던 것이라니 말이지. 믿어지지가 않아."
그녀는 울고 있었다. 처음엔 아주 약하게 흐느적거리더니 나중엔 아예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아, 그녀는 그 떠나간 남자에게 미련이 많구나. 난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른 나무껍질처럼 꺼칠했다. 아마도 그 헤어짐의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않고 아무 것도 하지 못했겠지. 난 그녀를 잘 안다. 우린 똑같으니까.
"을진아, 내가 전화 걸어볼까? 그 사람한테."
"아니, 그 사람 네게도 아주 냉정할거야. 그것이 나를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거든."
난 안다. 슬퍼하면 슬퍼할 수록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이 더욱 깊어만 간다는 사실을.
"우리,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자. 그리고 소리 없이 잠적해 버리자. 어때 내 생각이..."
"그럼 어딜 가게?"
"나 한테 맡겨, 그리고 그 사람한테 전화를 거는 거야. 아주 먼 곳에서. 그럼 아주 아득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글쎄, 난 왜 그날 을진이를 설득해 그런 제안을 내놓았던 것일까, 사실은 내가 그에게서 그렇게 잠적해 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가 내게 연락을 해 왔을 때 내가 없는 빈자리를 그도 그만큼 슬프게 느낄까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우린 길을 달리고 있었다.
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