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자리를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배신감이 섞인 눈물이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조차 없는 그 감정을, 그 밤을 내가 어떻게 뜬눈으로 지 세웠는지 아마도 그날 밤,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입술을 물어뜯으며 맹세했던 것 같다.
그는 다음날도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의 차가운 말투에 그는 당황하는 듯 했다.
"나 물어볼 말이 있어."
"응, 그래, 그럼 퇴근하고 베아트리체에서 만날까."
베아트리체는 우리가 즐겨 찾는 레스토랑이었다.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숨어서 키스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를 애무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아니, 거기 말구, 차를 가지고 오면 안될까."
그날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용기가 없었다. . 그는 어김없이 차를 가지고 내게 왔다. 그는 내가 차안에 오르자마자 나의 입술을 갈증난 사람처럼 빼앗아 갔다. 그리고 숨을 거치게 몰아 쉬었다.
"저기, 그 여자 선배라는 사람, 그 동화작가 말인데"
그는 약간 당황하는 듯 했다.
"왜 그 여자가 왜?"
"응, 나 어제 그 여자 만났어. 그 여자의 가슴이 그렇게 예뻤어?"
"........"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강변에 세워 둔 차는 점점 어두 속에 뭍혀가고 있었다. 일렁이는 파도가 곧 우리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밤이었다. 한참 뒤에 그가 말을 이었다.
"실수였어. 그날밤, 그 여자의 구두 굽이 뿌러졌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까지 바라다 주게 되었고,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냥, 그냥 아무 감정 없었어. 정말이야."
"그 여자 사랑해?"
"무슨 소리 하는거야. 사랑이라고? 나는 아무나 사랑하진 않아. 사랑한다는 말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다구."
그는 잠시 동안 허공속으로 시선을 던진 채로 나를 끌어당겨 내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동그란 젖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움직이던 하얀 젖이 그의 입속으로 점차 들어가고 있었다. 산딸기 같이 오른 젖꼭지를 빠는 그의 아이 같은 옆 모습을 내려다보다간 내 얼굴을 그의 품에 묻어버리고 하염없이 흐느꼈다.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을 그냥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내 인생에 이런 비슷한 종류의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날지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린 남들이 소위 말하는 연인 사이였다. 단지 단 둘이 있을 때만, 만약 우리 사이에 누군가가 낀다면 우린 그저 아는 사이의 남녀일 뿐이었다. 그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때 난 정면으로 그 이유를 묻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 이유를 묻게 되면 그가 날 힘들어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기 때문일게다. 난 그를 더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게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그저 그에게 가고 싶었다.
그의 야수적인 눈빛 때뿐만이 아니라 그는 여성의 장점을 발견해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주 볼품 없는, 형편없이 매력 없는 여자가 앞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가장 최고의 장점을 끄집어내어 상기시켜 줄 수 있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에 의해 장점이 발견 되어진 여자들은 영락없이 그의 품으로 달겨드는 것이다. 그가 모래속에 감추어져 있던 흑진주를 발견해 주었다는 듯이...
한쪽이 연애의 반칙을 했음에도 난 그와 헤어질 마음이 없었다. 그져 모욕과 수치를 감수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욕은 또 다시 이어졌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는 할 일이 많아 회사에 출근한다고만 했다. 나는 외로워 졌고, 홀로 영화를 본 후 그 근처에 빨간 립스틱의 영이라 불리우는 여자의 집이 그 근처임을 깨닫고는 그녀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문을 열어 줄 때 혹시 그녀가 아닌 동생인가 하고 착각을 할 뻔했다. 맨 얼굴의 그녀는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순수해 보이는.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잘 됐다. 나도 심심했는데..."
그녀와 나는 오래 만났던 옛 친구처럼 곧 친해질 수 있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사이에도 여러명의 남자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럴 때마다 영은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내며 각기 다른 남자들에게 비슷한 방법으로 애교를 떨다 전화를 끊었다. 우린 그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영이 먼저 그에 대해 얘기했다.
"그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이예요. 여자도 주변에 많고, 난잡한 것도 같고..."
"아, 예, 그렇게 여자가 많은가요? 난 몰랐는데...그래도 우리에겐 잘하잖아요."
"그런가, 맞다, 우리한테 잘하면 그만이지 뭐"
난 혹시 그에게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다 그녀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귀에 대고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곤 여전히 비슷한 방법으로 애교섞인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 시간 없어요. ...친구 와 있어요....안돼요. 호호호....그럼 잠깐 친구에게 물어보구요."
그녀는 수화기를 가린채 내게 물었다.
"그 사람인데요. 지금 심심하다구 이쪽으로 오겠다는 데 같이 만날까요?"
"그 사람이요?"
내 핸드폰의 다섯개 밧데리가 강하게 반짝거리고 있었고, 통화 오류지역도 아니었다. 그는 오늘 몹시 바쁜 날이었고, 시간이 났다면 내게 전화를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심심하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영은 그에게 내가 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수화기에 대고 함께 있는 친구가 나라는 것을 얘기하려고 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거칠게 빼앗아버렸다.
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