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게다. 계속되는 우연. 아니, 실은 우연이 아니었던가.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그러니까 어느 빌딩의 고층에 자리잡고 있는 스카이라운지였다. 그때 나는 차이니즈 칼라가 달려 있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감청색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였는지, 그는 나를 쉽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분명 그 감청색 자켓 때문에 내가 그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나는 그 이후로 절대 그 감청색 자켓을 입지 않았으니까.
테이블에 놓여 있던 맥주가 모두 비워지고, 새로이 웨이터에게 맥주를 주문하려고 허리를 튼 그가 드디어 내가 자신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새로운 인물임을 알아채고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 때였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의 여성을 향한 야수적인 본능의 눈빛이 잠시 내게 멎었던 그 순간에 난 그만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웨이터와 눈을 맞추고, 맥주 5섯 병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 바로 허리를 틀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붉은색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여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그의 표정은 뭐랄까, 한순간도 이 여자에게서 눈을 뗄수 없다는, 떼게 되면 다른 남자에게 그 여자를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어떤 불안감이 섞인 그런 표정이었다. 그와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 여자가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다. 한바퀴 입안에서 굴려 내는 신음 비슷한 그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 남자들은 자지러지게 또 한바탕 웃곤 했다. 나란 존재가 그 자리에 새로이 도착 했다는 사실이 그들 사이에 인식된 것은 그의 옆에 앉은 립스틱의 주인공이 내게 말을 건네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머 저 분은 누구시지요?"
"아, 저, 저는..."
그때 나의 반대 방향에 앉아 있던 나를 불러준 조그만 출판사에 편집장으로 있는 N선배가 나에 대해 설명을 했다. 아주 짤막하면서도 간결했다.
"응, 소설가야, 아직 데뷔는 하지 않았지만..."
N선배는 그날 오후 내게 전화를 걸어 '광고쟁이를 만나는데, 함께 보면 심심하지 않겠노라고 생각 있으면, 나오라고만 했다. 그리고 '짝도 맞고'라는 말을 말끝에 얼버무렸었다.
소설가? 난 속으로 웃었다. 난 한편의 소설도 쓴 적이 없는, 그저 출판사의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남의 소설을 교정보는 출판사 여직원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어머, 소설가세요? 어머 그럼 소설을 쓰시겠네요? 어머머, 근사하다."
나는 눈을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립스틱만이 진한 것이 아니라 마스카라도 아주 진하게 바르고 있었다. 뭐랄까, 아주 뇌세적인 모습의 얼굴이었다. 여자인 나에게 마저 방긋방긋 교태로운 웃음을 짓던 여자. 순간 '아마 내가 레즈비언이었다면 저런 여자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난 생각했다.
그녀의 관심어린 질문과 동시에 그 또한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나를 자세히 관찰하는 듯 했다.
"어, 그럼 요즘 소설을 쓰고 계시겠네요?"
그가 내게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난 소설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첫 질문에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진 않았다.
"네, 요즘 쓰고 있는 중이예요. 조만간 끝날 것 같진 않지만..."
난 아마 그때부터 진짜로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질문, 그 첫 질문이 날 소설가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아주 큰 변화였고, 그는 그 큰 변화와 함께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 여자의 관심과 동시에 그는 내게 관심을 보여 왔다. 아니 어쩌면 그 여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요즘 무슨 소설을 쓰고 계세요."
"응, 네... 애정 소설을 쓰고 있어요."
"아, 그래요. 저도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그런 것이 소설로도 이용되곤 하나봐요?"
"애정 소설? 와우1x" 빨간 립스틱의 여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N선배가 끼어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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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여기가 뭐 싸루려 소설론 강의 시간이냐, 다 집어치워, 술맛 떨어지니까. 술이나 마시자구."
우리는 술을 마셨다. 2차, 3차로 자리를 옮겨 가며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다. 나는 심하게 취해 있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번번히 거절하는 그녀에게 술병이 밀쳐지고 나면 여지 없이 그는 내게로 술병을 돌려 술을 권했고, 난 한번도 그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었으니까.
나의 이상형이 어떤 것이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난 할말이 없다. 그저 그를 처음 보는 순간, 그는 나의 이상형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때 나는 겨우 23살이었고,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이였으며, 부푼 꿈들만이 내 머리위를 날아다니는 그런 뜬구름 같은 날들이었으니까.
그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N선배가 우리 둘을 같은 택시에 밀어 넣었다. 붉은 립스틱의 여자는 N선배와 함께 있었다. 그는 아주 아쉬운 듯 하지만 자신을 가눌 수 없었는지, N선배가 시키는 대로 나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그와 나는 비슷한 방향에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우리집 근처에 가서 술 한잔 더 할래요?"
그때가 몇시였더라. 아마도 새벽 3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을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희미하게 빛나는 싸구려 모텔 간판 뿐이었다. 그는 비척거리며 내 손목을 끌고 '수정 모텔'이라 쓰여진 곳으로 들어섰다.
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