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여기 있어? 여기 있다고 내가 이혼이라도 해 줄줄 알아? 절대로 그건 못하지. 내가 저 년하고 너하고 알콩달콩 사는 꼴 그냥 두고 볼 줄 알아?" 알았어. 그냥 가자, 조용히 가자 오늘은, 제발, 안에 손님 있어. 마루 한 귀퉁이에 앉아서 그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본 부인인 듯한 여인은 사내다운 호탕한 몸짓으로 이미 늙어 아무런 남자 구실도 못하게 보이는 그 남편을 자식 부리듯 끌고 나가고 있었다. 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서 소주잔을 붙잡고 앉아있는 여인은 십년은 족히 더 울었을 그 눈물을 그날도 흘리고 있었다. 아주 메마른 눈물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 남자 때문에 흘리는 눈물 같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들 세 사람은 아주 오래된 동네 친구처럼 그냥 그날도 여전히 다툼을 벌였을 뿐인 것처럼 말이다.
순간 방안은 고요해 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멈췄고, 그리고 행동을 멈췄다. 우리가 그 순간에 한 일이란 단지 밥상 밑을 내려다보았다는 것뿐이었다. 민망한 순간이 언제 있었냐는 듯,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돌려 뭐 더 필요한 것 없냐고 물어 왔다. 방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의 손길은 더욱 축축해져만 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시간은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한의사라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무엇인가 골똘히 얘기를 나누는 듯 했다. 비가 내릴 것만 같은 밤이었다.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아마 바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겠거니 생각했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 바짝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한의사의 여자였다. 꽤나 술을 많이 했다고 느꼈는데, 여자는 멀쩡하게 걷고 있었다. 여자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나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어서 인듯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뒤에서 그는 그 한의사와 고개를 숙인 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저 남자랑 애인 관계예요? 얼마나 되었는데요?"여자는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네, 뭐가 얼마나 되요?" "알게 된지 얼마나 되었냐구요."
그 순간 그녀에게 그 사실이 왜 궁금했을까를 아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의 사랑도 그만 빛을 잃고 말았다. 아니 오히려 번쩍하며 불길이 타올랐는지도 모른다. 다시금 타오를 것만 같았던 나의 끈적끈적한 그 사랑이...
"기분이 어때요, 그런 관계는요."
그녀는 아주 당돌하게 내게 묻고 있었다. 나와 그 사람의 관계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인지, 그의 여자 관계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인지,나로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묘하게 기분 나쁜 질문이었다.
"그런 관계란요? 무엇을 얼마나 우리에 대해 알고 있기에..."
"아니, 그냥 궁금했어요. 사람들의 인간 관계가요. 참 얽히고 설켜서 잘도 돌아가는 것 같은데, 우리만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두 분이 안좋으신가봐요. 다른 사람의 얘기까지 궁금해 하시는 것을 보니 말이예요."
"아니, 난 그냥, 그 쪽이 결혼한 남자와 사귀는 기분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을 뿐이예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구요."
난 한참 동안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던 이상한 느낌의 냄새, 무엇인지 달라진 듯한, 그의 끈적이는 손길의 느낌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난 그때 알 수 있었다. 그는 5개월 전에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지금 임신중이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난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한의사의 여자와 장단을 맞추며 이것저것 아귀를 맞추어 가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으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공기는 차가웠고, 맑았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몇 번 떠먹었던 닭 도리탕의 뻘건 국물이 뱃속에서 요동을 쳐 대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도, 배신감도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06;
30;
;는 일종의 종말의 기분이었다. 종말의 냄새를 아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난 기꺼이 그 기분을 아주 상세히 설명해 줄 수 가 있을 듯 하다. 바로 그날 밤 내가 그 냄새에 취해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불륜의 방식까지 깨달아야만 했던 그 순간을, 그리고 그의 끈적이던 손의 느낌을, 내게 안타깝게 매달리던 그의 눈길을, 난 그 순간에 모두 이해해 버렸다. 물론 그에게 어떤 이유와, 변명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난 그 얘기를 들어주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너를 기다리다가 너무 화가 나서 그래서 그냥 아무하고나 결혼해 버렸다. 난 그녀를 사랑하지 조차 않는다 같은, 그런 아주 틀에 박힌 변명 같은 것이라도 들었어야 옳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마지막 삼류 드라마 같은 기억이라도 남길 수 있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난 그 사람을 사랑했던 한순간의 여자였으니까.
시계의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은 사이 좋게 겹쳐져 있었다. 12시였다. 아주 외롭다고 느껴졌다. 함께 겹쳐져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떨어져야 할 그들의 일상이 말이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지럽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가 대머리의 한의사와 여전히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고 얘기를 나누는 사이, 난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아주 멍하게도 그저 지나쳤을 뿐이었다.
난 그해 어떤 일간지의 소설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소설을 쓸 이유가 없어 졌으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순간 그 사람의 일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는 인생의 진실을 난 그를 통해 배워 버렸다. 그래서인지 난 다시는 사랑이라는 것에 쉽게 빠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했다. 을진이는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말이다. 가끔 생각 해 본다. 마지막 그의 모습이라도 보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라도 보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