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용 서 (容恕)
Someone said, Love your enemies." Someone asked, Why should I love my enemy? He is my enemy, so why should I love him as myself?" 그렇다1x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1x"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끝없이 묻고 있다. 왜? 내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용서 (容恕)라는 말의 뜻은, 원수를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관용심을 베풀어서, 그 원수의 잘못이나 실수를 벌하지 않고 꾸짖지 않는 것 뿐이지, 원수의 모든 잘못까지 깨끗이 씻어 없애주라"는 뜻이 아니다. Forgiveness라는 것은, 사면 면죄 행위가 아니다. 사실상의 Forgiveness(용서)의 의미는 Resentment (원한)과 Indignation(화, 분개)를 품지않고 있는 상태의 수준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하긴 그것조차도 인간에게는 최고로 어려운 경지"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서라는 것을 그 무슨?완전히 없었던 백지의 상태 때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받아드리고 있기에 더욱 더 용서의 자세와 상태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다시한번 부언 하노니 , 「용서라는 것은 단지?원한이나 분노를 품지않고, 원수의 잘못이나 실수를 벌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마음속에 깊히 새겨 두시라1x 하지만 이런 상태 조차도 인간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를 영어로 Forgiveness라고 하
45716;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면? 그런 마음의 상태 조차도 내 스스로의 의지(will)로 되는 것이 아니라, Given (주어져 져야만 된다) 는 것이다. 서양의 언어들은 그 점에 있어서 모두 다 일치하고 있다. [French say par-donner," Spanish say per-donar."] 다시말해서, 용서라는 것은 내가 마음먹고 용서해 주어야지1x"라고 정했다고 해서, 그 의지(will)대로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의지와 노력외에 그 어떤 작용에 의하여 그 마음의 상태로 놓여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와같은 깊이있는 "영적인 현상"을 무시하고, 오직 용서해 주어라1x" 용서해 주면 될것이아닌가?"용서하자1x"라고
떠드는 것은 그냥 헛소리이고 , 입으로만 떠드는 소음일 뿐이다.
좀더 쉽게 설명을 하면 ? 용서라는 것은 To give가 아니고, To receive (그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받게) 되어야, 비로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관용의 상태가 생기게 되는 것은, 내 자신의 노력과 의지와는 별도로, 영적이고 신성(Divine)의 관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Bible속의 구절을 한번 들쳐보고, 생각해 보기로 할까?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리르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이면 되겠읍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곱번 뿐 아니라 , 일곱번 씩 일흔 번 이라도 용서 해 주어라." -마태오 18: 21~22. 이때의 베드로의 질문은 이런 뜻 이었으리라. 저에게 정확한 횟수를 알려 주십시요. 그래야만 저도 할만치 해볼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나 계속 질질 끌려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 의도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아무런 한계가 없이 그냥 계속해 나가거라. 나는 정확한 횟수를 정하여, 너에게, 형제와의 관계를 끝낼 수 있는 구실을 주고 싶지 않다1x"였다.
그렇다 1x 바로 이점 ?과연? 어느 정도면 충분한가? When is enough? Enough is enough?"라는 것이, 모든 인류가 지니고 있는 숙제이리라1x 바로 이와같이 과연 어느 정도면? 해 볼 만치 해본 것일까?"라는 한계를 일단 정해 놓고, 그 정해 놓은 한계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용서라는 것이 더욱 더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들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몇번(7번?) 몇달(?) 몇년(?) 등등을 일단 정해놓은 상태에서, 스스로 노력하였다고 쳐도, 그 정해 놓은 한계가, 원수의 입장 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고,
오로지 자기만의 일방적인 노력이요 기준아닌가 ? 더군다나, 그 일방적으로 자기가 정해놓은 테두리안에서,
자기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 용서가 저절로 될 것 같은가? 오히려 그런 식으로 노력을 하면 할수록, 분노만 더욱 더 솟아 오르게 되어있다.
( 내가 이렇게 오래 기다려 주었는데? 벌써 수 없이 참아 왔는데? 이미 해 볼만치 해 보았는데도 불구하고...용서를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옹졸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나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했는데...) 사실상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인데... 용서의 기준, 한계 등등을 '다른 사람의 기준(예를 들면,예수의 기준, 도덕, 윤리, 사회의 통념등등)'에 과연 맞추려고 노력해서 되는 일인가? 어차피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 다른 사람의 기준이 그 무슨 필요가 있으며? 내가 용서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조언이 그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란 ? 용서해 주겠다고 노력하고 애쓸 것이 아니라,
모든 부대낌이 스스로 지나가게끔 해야 된다는 점이다 . (Stop trying to forgive" and just sort of let go1x")
그리하여 , 자기 자신의?의지(will)" 대신에, willingness(기꺼이)"가 대치 되도록 해야하고, effort (애쓰기)보다는 openness (받아드리는 것) 가 더욱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실상 , 그대가 그대의 원수를 용서해 주었다고 해서, 그 일들이 그대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가? 어차피 그대의 기억속에 남아있게 될 것이고, 늘 아픔도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방법은 딱하나, 분노의 상태가 줄어 들어가서, 어느날 그 자리에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저절로 들어차게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렇게 되는 현상을 단지 "영적인 작용"이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 글/ 이상봉 (철학박사)
*All rights reserved and copyrighted by Sang-Bong Lee, Ph.D. *Printed here by permission of Sang-Bong Lee.
Someone said, Love your enemies."
Someone asked, Why should I love my enemy?
He is my enemy, so why should I love him as myself?"
그렇다1x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1x"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끝없이 묻고 있다.
왜 ? 내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용서 (容恕)라는 말의 뜻은,
?원수를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관용심을 베풀어서 , 그 원수의 잘못이나 실수를 벌하지 않고 꾸짖지 않는 것 뿐이지, 원수의 모든 잘못까지 깨끗이 씻어 없애주라"는 뜻이 아니다.
Forgiveness 라는 것은, 사면 면죄 행위가 아니다.
사실상의 Forgiveness(용서)의 의미는 Resentment (원한)과 Indignation(화, 분개)를 품지않고 있는 상태의 수준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하긴 그것조차도 인간에게는 최고로 어려운 경지 "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서라는 것을 그 무슨?완전히 없었던 백지의 상태 때로 되돌아 가는 것 "처럼 받아드리고 있기에 더욱 더 용서의 자세와 상태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다시한번 부언 하노니 ,
「용서라는 것은 단지?원한이나 분노를 품지않고 , 원수의 잘못이나 실수를 벌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마음속에 깊히 새겨 두시라1x
하지만 이런 상태 조차도 인간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
용서를 영어로 Forgiveness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 하면?
그런 마3
020;의 상태 조차도 내 스스로의 의지 (will)로 되는 것이 아니라,
Given (주어져 져야만 된다) 는 것이다.
서양의 언어들은 그 점에 있어서 모두 다 일치하고 있다 .
[French say par-donner,"
Spanish say per-donar."]
다시말해서 ,
용서라는 것은 내가 마음먹고 용서해 주어야지 1x"라고 정했다고 해서,
그 의지 (will)대로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의지와 노력외에
그 어떤 작용에 의하여
그 마음의 상태로 놓여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
그와같은 깊이있는 "영적인 현상"을 무시하고,
오직 용서해 주어라 1x" 용서해 주면 될것이 아닌가?"용서하자1x"라고
떠드는 것은 그냥 헛소리이고 , 입으로만 떠드는 소음일 뿐이다.
좀더 쉽게 설명을 하면 ?
용서라는 것은 To give가 아니고,
To receive (그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받게) 되어야,
비로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따라서 그러한 관용의 상태가 생기게 되는 것은 ,
내 자신의 노력과 의지와는 별도로 ,
영적이고 신성 (Divine)의 관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Bible속의 구절을 한번 들쳐보고, 생각해 보기로 할까?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리르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이면 되겠읍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
일곱번 뿐 아니라 , 일곱번 씩 일흔 번 이라도 용서 해 주어라." -마태오 18: 21~22.
이때의 베드로의 질문은 이런 뜻 이었으리라 .
저에게 정확한 횟수를 알려 주십시요 . 그래야만 저도 할만치 해볼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나 계속 질질 끌려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 의도에 &
#45824;한 예수의 대답은 ,
?아무런 한계가 없이 그냥 계속해 나가거라 .
나는 정확한 횟수를 정하여 , 너에게,
형제와의 관계를 끝낼 수 있는 구실을 주고 싶지 않다 1x"였다.
그렇다 1x
바로 이점
?과연 ? 어느 정도면 충분한가?
When is enough? Enough is enough?"라는 것이,
모든 인류가 지니고 있는 숙제이리라 1x
바로 이와같이
과연 어느 정도면 ? 해 볼 만치 해본 것일까?"라는 한계를 일단 정해 놓고,
그 정해 놓은 한계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용서라는 것이 더욱 더 어렵다는 사실을 , 우리들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
몇번 (7번?) 몇달(?) 몇년(?) 등등을 일단 정해놓은 상태에서,
스스로 노력하였다고 쳐도 , 그 정해 놓은 한계가,
원수의 입장 처지 "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고,
오로지 자기만의 일방적인 노력이요 기준아닌가 ?
더군다나 , 그 일방적으로 자기가 정해놓은 테두리안에서,
자기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 용서가 저절로 될 것 같은가?
오히려 그런 식으로 노력을 하면 할수록 ,
분노만 더욱 더 솟아 오르게 되어있다 .
( 내가 이렇게 오래 기다려 주었는데? 벌써 수 없이 참아 왔는데?
이미 해 볼만치 해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를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옹졸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나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했는데 ...)
사실상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인데 ...
용서의 기준 , 한계 등등을 '다른 사람의 기준(예를 들면,예수의 기준, 도덕, 윤리, 사회의 통념등등)'에 과연 맞추려고 노력해서 되는 일인가?
어차피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 ...
다른 사람의 기준이 그 무슨 필요가 있으며 ?
내가 용서 못하는데 , 다른 사람의 조언이 그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란 ?
용서해 주겠다고 노력하고 애쓸 것이 아니라 ,
모든 부대낌이 스스로 지나 가게끔 해야 된다는 점이다 .
(Stop trying to forgive" and just sort of let go1x")
그리하여 , 자기 자신의?의지(will)" 대신에, willingness(기꺼이)"가 대치 되도록 해야하고, effort (애쓰기) 보다는 openness (받아드리는 것) 가 더욱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실상 , 그대가 그대의 원수를 용서해 주었다고 해서,
그 일들이 그대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가 ?
어차피 그대의 기억속에 남아있게 될 것이고 ,
늘 아픔도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
그렇다면 ?
방법은 딱하나 ,
분노의 상태가 줄어 들어가서 ,
어느날 그 자리에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저절로 들어차게 되는 것 "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
그렇게 되는 현상을 단지 "영적인 작용"이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알겠는가 ?
~ 글/ 이상봉 (철학박사)
*All rights reserved and copyrighted by Sang-Bong Lee, Ph.D.
(모든 권리는 글쓴이에게 있음.)
*Printed here by permission of Sang-Bo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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