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마음은 그 무엇인가를 늘 기다리고 있다.그 어떤 기회가 틀림없이 오게 될 이라고? 그 날과 그 시간(The day and hour)은 이미 지나 간 것이 아니고, 틀림없이 앞으로 '오게 될 것'이라고. 틀림없이 오기는 오는 데, 지금 당장은 절대로 아니고,
앞으로 오게 될 것이니, 기다려 보자1x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기다려 보자1x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Jews(유태인)들이, 지금도 Messiah(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똑같다. 그들은 메시아를 수천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기다릴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에는 한계가 있으니, 한평생의 기다림이 헛것이 되는 것이, 좀?.) 하지만, 기독교도들의 메시아는 이미 도래 했다1x
실제로 기독교 교리에 의해서도 그렇고, 그들 자신의 맹세와 신앙의 고백에서도
그렇고?.
그렇다1x 그들에게는 예수가 구세주(Saviour)이며, 또 예수가 틀림없이 자기네들의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받아 드린다고 맹세하고 선서까지 하면서, 세례( Baptism)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있기는" 유태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그 기다림의 이름만 약간 달라서? '메시아의 출현'이 아니고, '예수의 재림.주님의 재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천년 전의 그 예수의 탄생,그 메시아 탄생의 진정한 의미와 내용은 어디로 갔는가?그것은 단지 역사적인 기록으로만 온 것이니까? 이번에는 역사적인 기록이 아닌, 상상 공상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는 것일까? 역사적인 기록 보다는 상상으로 끝없이 기다려 보는, 그런 기다림이 더 맛있고, 종교적이라는 의미일까?
그렇다1x 사람들은 God (신)을 기다리고 있다1x하지만, 내 눈에는 그 점이 가장 이상스럽게 보인다. 왜냐하면? "신(God)은 이미 태초에 있었다1x" 라고 하면서? 왜? 이토록 늦게 온 당신이 이미 그 태초에 와 있는 신을 기다려야 할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기다리겠다는 것일까? 따라서, 내가 볼 때? 그대가 기다리고 있는 신(God)은 실제의 신이 아니고, 단지 그대 자신의 '기다림'일 뿐이다. 그렇다1x 그 무엇인가?를, 무조건 기다려야만 하는, 그대 마음의 본성이 그대를 그렇게 하도록까지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다.
사실상, 종교( Religion)를 '직업'으로 하고 있지 않은,동서양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 뿐이다. 그렇다1x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를 생활화 해야만 된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 생에서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서, 저 생까지 언급하는 사람들도 수두룩 하다).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고 실천함에 있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사랑과 같은 것이라서, 지금 당장 실천 하는데에 의미가있는 것이지, 뒤로 미루고 기다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 Mt.24:36, Mk.13:32, Lk.17:26)"라는 말만 믿고, 오직 기다려야만 하겠는가? (아무도 모른다1x고 써 놓은 사람들은? 그렇다면,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다는 소리일까?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야?) 그뿐만이 아니고? 이렇게 까지도 기다리고 있다.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Mt.7:7, Lk. 11:9, Rev.3:20)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도 수없이 여러번 이런 구절들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언제까지 두드릴 것인가?" 또 "왜? 두드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 해 보지도 않고, 하다못해 의문 조차 품어 보지도 않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다. 마찬가지로, Salih 라는 선생도 제자들에게 "문을 두드리라1x 그러면 틀림없이 열리게 된다1x"라고, 늘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수피(Sufi) Rabia (713-801)가 이렇게 물었다. " 선생은 과연 언제까지나 계속 '열리게 될 것이다1x 열리게 될 것이다1x'라는, 그 미완의 미래용법 (future tense)만 사용하고, 또 '기다리라'고만 할 겁니까?" "??.???" "도대체, 그 문이 언제 잠겼던 적이나 있었나요? (Was the door ever closed?)" "?..???"
그렇다1x 그대여, 깊히 생각 해 보시라1x Bayazid Bistami가 그의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스승이 " 저 창가에 놓여 있는 책을 가져 오너라1x" 했다. 그러자, 비스타미가 "창문이라니요? 창문이 어디에 있단 말씀입니까?"라고 되 물었다. " 자네는 이곳에 수년 동안이나 있었으면서도 창문을 본 적이 없단 말이냐?" " 저는 창문을 본 적이 없읍니다. 제가 창문에 그 무슨 볼 일이 있읍니까?
저는 스승님외에 다른 것을 본 적이 없읍니다1x" "이제 고향으로 돌아 가거라1x 너의 공부는 다 되었다." "?????"
다시 말하면, 지금 현재의 상황이나마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라1x (In short, one world at a time1x) 하다못해, 영적인 것하고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 형식주의자'라고 낙인이 찍혀있는 공자에게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논어: 선진편 11장에 보면, 제자인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공자가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라고 했고, "죽음에 대해서 묻겠읍니다, 죽음은 어떻습니까?"라고 또다시 묻자,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겠느냐?"라고 했다. (하긴 이쪽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나, 저쪽 것들이라는 귀신, 죽음, 천당, 지옥, 영생 등등을 떠들게 되어있다.)
그렇다1x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는가? 에만 관심을 가져라.그래야만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기쁨과 환희를 맛 볼 수 있으니까? " 환희, 평화, 지복, 영생"의 모든 것들이 온통 뒤범벅된 이상야릇한 그 날과 그 때가 틀림없이 구원의 손길과 함께 언젠가는? 도래하게 될 것이니 기다려보자1x" 라고 하면서,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기쁨과 환희"를 마다 하려고만 하는가? 그대여1x 그 이유를 나에게 말해 보아라1x 왜? 지금 찾을 수 있는 것들을 근본적으로 마다 하면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니면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날과 그 때"를 기다리는 이유를? 그대여1x 지금의 기쁨을 포기하고, 오지도 않는 나중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상봉 (철학박사 ) All rights reserved and copyrighted 2000
* Sang-Bong Lee, Ph.D.